2026년 어느 개발자의 일기 (디스토피아 판)

2026년 어느 개발자의 일기 (디스토피아 판)
Credit: Joanna Maciejewska (https://www.instagram.com/authorjmac)
미래 조직 설계도: AI와 호모 레스폰사빌리스(책임지는 인간) 글을 쓴 후, 재미삼아 디스토피아적 관점에서 가까운 미래에 있을 만한 어느 개발자의 일기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2026년 MM월 DD일

AI가 세상을 바꾼다더니, 정말 내 세상이, 아니 우리 개발자들의 세상이 뒤흔들리고 있다. 밤새 버그와 씨름하고, 새로운 기술로 세상을 놀라게 할 서비스를 만들던 그 짜릿함. 코드 한 줄에 세상을 담으려 했던 그 열정. 그게 바로 개발자로서의 나를 뛰게 하던 심장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좀 다르다. AI는 이제 단순 코드 작성을 넘어 테스트, 배포까지 넘본다. '효율성'이라는 그럴듯한 이름 아래,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개발의 '재미'는 점점 AI의 차지가 되어가는 것 같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건… '책임'이라는, 어딘가 낯설고 무거운 이름표다. 누가 '호모 레스폰사빌리스(Homo Responsabilis)', 즉 '책임지는 인간'이라고 부르던데, 솔직히 말하면 AI가 벌여놓은 일의 뒷수습과 최종 책임을 떠맡는 역할처럼 느껴질 때가 더 많다.

AI는 만들고, 나는 책임지고? 이게 정말 최선일까?

AI, 참 똑똑하다. 어쩌면 나보다 더 빠르고 그럴싸한 코드를 순식간에 뽑아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AI는 자기가 만든 코드가 일으킨 문제로 법정에 설 수도 없고, 사용자에게 진심으로 머리 숙여 사과할 수도 없다. 결국 그 모든 책임은 우리, 인간 개발자의 몫으로 돌아온다. AI가 생성한 코드의 품질을 보증하고, 시스템 안정성을 관리하고, 무엇보다 AI가 예측 불가능한 사고를 쳤을 때 쏟아지는 모든 비난과 수습까지. 이게 바로 '호모 레스폰사빌리스'의 현실이다. AI가 차린 잔치 뒤에 남은 설거지를 도맡아 하는 기분이랄까.

'책임 분산'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진다. 혼자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는 것보다는 낫겠지. CTO는 기술적 '책임'을, CPO는 제품 '책임'을 나눠 맡는 식으로 리스크를 관리한다고 한다. 회사 입장에서는 그게 맞을 거다. 우리 개발팀의 모습도 이제 최소한의 인원으로 각자의 '책임' 영역 만을 명확히 하는 조직이다. 조직은 더 작아지고, 각자의 책임은 더 무거워졌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역량은 시스템 전체를 보는 눈, 비판적 사고, AI 도구 활용 능력, 보안 의식 같은 것들이란다. 물론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역량들이 과연 내가 개발자로서 꿈꿔왔던 성장의 모습일까? 아니면 그저 AI 시대에 '책임'이라는 굴레를 좀 더 잘 짊어지기 위한 조건일 뿐일까?

'책임자'라는 이름은 번듯하지만, 우리가 한때 느꼈던 '만드는 즐거움'은 그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우리가 사랑했던 그 개발은 다 어디로 갔을까? 코드를 짜는 즐거움, 밤새 고민해서 짜낸 알고리즘, 동료들과 격렬하게 토론하며 찾아낸 창의적인 해결책, 테스트 케이스를 만들며 완성도를 높여가던 과정, 마침내 서비스가 세상에 나왔을 때의 그 벅찬 감동. 이런 것들이 개발의 본질 아니었던가?

이제 AI는 우리가 '실행'하던 많은 것들을 가져갔다. 생산성은 분명 높아졌겠지. 하지만 가끔은 내가 하고 싶었던 멋진 일들을 전부 가져가 버린, 너무 유능해서 얄미운 후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에게 남은 건 AI가 생성한 코드의 품질 '검증', 보안 취약점 '점검', 시스템 안정성 '관리', 그리고 문제가 터졌을 때의 '책임'이다. 나는 더 이상 창조자가 아니라, AI라는 유능하지만 언제 사고 칠지 모르는 직원을 감시하고 뒷수습하는 관리자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다. 문제의 핵심을 파고드는 기술적 도전보다는, '책임'이라는 이름 아래 각자의 역할에 맞는 서류 작업과 보고, 끝없는 회의에 파묻히기 쉽다. 문제 해결의 '재미'마저 AI에게 빼앗기고, 우리는 그저 AI가 잘 하고 있는지 감시하고, 문제가 생기면 대신 욕먹는 '욕받이' 역할만 남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우리는 이제 마법을 부리는 대신, 마법이 사고 치지 않도록 감시하는 '책임자'가 되었다. 씁쓸하지만, 이게 내가 마주한 현실인 것 같다.